착취적 성매매 방관하는 세상과 너무나 닮아 있는 n번방

봄날|<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저자
지난해 11월, 봄날 작가는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반비)를 펴냈다. ‘성매매라는 착취와 폭력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용감한 기록’이라는 부제를 단 책에는 20여년을 성매매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봄날 작가가 성매매 산업 현장에서 경험한 착취와 폭력이 생생하게 담겼다. 그는 열 여덟 살의 나이에 업주에게 속아 유흥업소에 유입된 이후, 선불금의 덫에 빠져 20년이 넘도록 성매매 산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탈성매매 후 탈성매매 상담가로 활동하고 있는 봄날 작가가 성착취 범죄 n번방 사건에 대한 글을 경향신문에 보내왔다.

더불어민주당 선거유세가 벌어지고 있는 파주시 금릉역 앞 광장 건너편에서 여성단체 회원들이 n번방 가담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1인시위를 하고있다.  이준헌 기자

더불어민주당 선거유세가 벌어지고 있는 파주시 금릉역 앞 광장 건너편에서 여성단체 회원들이 n번방 가담자들의 처벌을 요구하는 1인시위를 하고있다. 이준헌 기자

세상과 닮아 있는 n번방

미성년 여성이 대거 포함된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범죄로 인하여 온 국민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텔레그램 n번방 실체가 드러나면서 성착취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텔레그램 ‘박사방’을 운영하던 ‘박사’가 경찰에 검거되면서 추악한 성착취 범죄의 전말이 드러났다. 유료회원과 관전자만 26만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숫자 앞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박사, 갓갓, 와치맨 등이 벌인 성범죄를 보면서 업소에서 나의 몸을 관전하며 웃어대던 구매자들이 떠올랐다. 그 구매자들은 다른 여성들의 옷을 벗겨 나의 몸과 비교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큰 소리로 웃어대던 그 구매자가 n번방의 관전자와 같았다. 업소가 아니면 갈 곳이 없었던 나를 선불금이라는 덫을 이용해 유린했던 업주가 바로 박사, 갓갓, 외치맨 등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미성년 여성들의 취약한 점을 골라 범죄의 끈으로 활용했고, 그 결과 살아 있는 여성의 신체에 해를 가하고 여성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관전하면서 능욕하고 환호했다. 여성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것이 폭력이자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는 가학적이고 악랄한 심리를 가진 사람을 인간으로 대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그들의 성착취 범죄는 여느 성매매 현장과 다르지 않았다.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는 차이만 있을 뿐 여성을 유인하고, 협박하는 방식은 성매매 현장의 일상이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여성의 나체사진과 영상을 가족이나 세상에 뿌리겠다고 겁박하는 모습들은 성매매 현장에서 포주들이 선불금을 갚지 않으면 가족에게 알리겠다는 방식과 일치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조주빈 일행과 포주들은 여성의 몸을 이용해 쉽게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다.

20여년 간 성매매를 경험한 여성이 쓴 삶의 기록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의 봄날 작가. 이준헌 기자

20여년 간 성매매를 경험한 여성이 쓴 삶의 기록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의 봄날 작가. 이준헌 기자

이 사건으로 인해 제일 괴롭고 힘든 사람은 바로 피해자들이다. 나는 지금도 그 구매자들의 웃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 괴로움과 아픈 상처가 트라우마가 되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피해자들이 자칫 자신의 삶의 끈을 놓을까 염려가 된다. 탈성매매 이후 끊임없는 경험의 재해석을 통해 나의 잘못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외롭게 자신의 트라우마를 들여다봐야 하는 고통이 피해자에게 남겨져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더 아파온다.

범죄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고 언론은 보도하고 있지만, 피해자에 대한 어떠한 사과 한마디 없는 범죄자의 모습을 보며 그간 성범죄를 다루던 사법부의 방식이 어떠했는지 돌아볼 수밖에 없다. 남성에게 관대해도 너무나 관대한 이 사회, 무엇이 범죄인지도 가름하지 못하는 판결이 텔레그램 n번방 범죄를 키웠다. 진화된 성범죄 앞에서 성산업 착취구조 해체와 수요 차단이라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하지 않는 사법부도 공범이다.

우리는(나는) 범죄자의 얼굴을, 나이를 알고 싶지 않다. 현재 여성의 신체가 노출된 영상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며, 트라우마만 남은 피해자들에게 어떠한 치료와 위로를 건넬 것인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는 범죄자들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가 궁금하다.

여성들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세상은 ‘관전’하고 있고, 성매매 현장과 텔레그램 n번방은 여성을 팔았다. 범죄의 현장과 세상은 너무나 닮았다.

이준헌 기자

이준헌 기자

<봄날|<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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