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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환대한 업소도 지옥이었다"…룸살롱·유리방·보도방·다방 '20년'

[회복자들]④ 18살 처음 발 들인 후 20여년 성매매
"짓밟혔던 경험"…트라우마 받아들이고 '회복 중'

(서울=뉴스1) 강수련 기자 | 2021-09-20 08:10 송고 | 2021-09-20 12:25 최종수정
편집자주 중독과 상처, 고통에서 회복돼 다시 출발한 사람들의 드라마, '회복자들'을 만났습니다. 삶의 끝에 내몰린 절망을 희망으로 이겨낸 우리 이웃들입니다.
지난 10일 성매매 경험 당사자이자 반성매매 활동가인 봄날(가명)과 인터뷰를 진행한 서울 성북구 여성인권센터 '보다'. 봄날은 카메라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 뉴스1 강수련 기자
지난 10일 성매매 경험 당사자이자 반성매매 활동가인 봄날(가명)과 인터뷰를 진행한 서울 성북구 여성인권센터 '보다'. 봄날은 카메라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 뉴스1 강수련 기자

어린 시절 봄날(가명)은 사각지대에 갇혀 있었다. 불행은 켜켜이 쌓였다. 아버지의 폭행, 어머니의 방관, 이웃 삼촌과 공장 어른의 성폭력, 임신중절의 고통에 그는 온몸이 아팠다.

지독한 가난도 봄날을 괴롭혔다. 최대한 오래 먹기 위해 물에 불린 수제비가 며칠씩 식탁에 올랐다. 가족 부양을 위해 중학교를 그만두고 미싱 공장에서 일한 15살의 그를 반기는 곳은 없었다.
봄날은 18살부터 20여년간 성매매 업소에서 착취를 당했다. 환대하는 업주를 따라 들어간 곳은 그러나 지옥이었다. 그는 "짓밟히면서 살았던 경험"이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지난 10일 서울 성북구의 여성인권센터 '보다'에서 봄날을 만났다. 그는 반성매매 최전선에 있는 활동가다.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은 책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반비출판사)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성매매 여성을 향한 낙인과 폭력은 여전해 가명으로 활동 중인 그는 스스로를 '회복 단계가 진행 중인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어렵지 않고 나쁜 일 아니다' 속인 업주"

-성매매로 유입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중학교 2학년을 마쳤을 때 저는 미성년자였어요. 별다른 자격증이 없던 제가 일할 곳은 공장밖에 없었어요. 공장 바깥의 사회에 더 나은 일자리가 있는지 몰랐죠.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돈을 더 벌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게 가족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친구를 따라 성매매 업소로 들어가게 됐죠."

-성매매 업소를 쉽게 들어갈 수는 없었을 텐데요.
"업주들은 절대 성매매가 힘들다고 말하지 않아요. 어렵지 않고 나쁜 일이 아니며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업소의 감언이설로 제 발로 들어갔죠. 당시만 해도 그렇게 많은 지각비, 결근비, 선불금에 나를 팔아넘기고 폭력을 휘두를 거라고 생각조차 못 했어요. 사람들은 그게 다 제 잘못이라고만 얘기해요. 저도 제가 선택했다는 사실에 계속 자학했죠."

업주와 구매자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선택지도 결국 업소였다. 빚이 불어나면 직업소개소의 '소개쟁이'를 찾았고 업소를 소개받았다. 해당 업주에게 선불금을 받아 다시 일했다. 그렇게 20년간 전국을 돌며 룸살롱, 유리방, 보도방, 커피다방에서 일했다. 봄날은 당시 생활을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눈빛에 서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가족을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 업소에서 일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업소에서의 삶은 어땠나요?
"제 삶 자체가 없었죠. 구매자들과 업주의 비위를 철저하게 맞추며 살았어요. 매일 죽고 싶었고 그러나 죽지 못해 살았죠. 특히 제주도 룸살롱에서 일했을 때는 극단 선택 충동이 많이 일었어요. 제주 앞바다에서 깡소주를 마시며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고 결국 뛰어들지 못하는 제 자신이 너무 싫은 거예요."

-왜 중간에 그만둘 수 없었나요?
"업주들은 선불금에 높은 이자를 붙여 갚으라고 했어요. 그에 더해 지각비와 결근비, 홀복(업소에서 입는 옷), 화장품을 사라고 강요했죠. 성매매를 하기 위한 비용은 성매매 여성의 몫이었기에 번 돈으로는 생활비도 빠듯했어요. 한마디로 성매매에 갇혀 버린 거죠. 또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는 데다 폭력에 이미 학습돼 있어 성매매 외 다른 무엇을 하려는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주종관계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건 더 어려웠고요."

-중간에 그만두고 떠나려고 한 적은 없었나요?
"혼자 원룸을 구해 일을 잠시 그만두기도 했어요. 2009년에는 가기로 한 업소에 돌아가지 않기도 했어요. 그땐 업주가 선불금을 걸고 사기죄로 저를 고소했죠. 결국 빚을 갚기 위해서 다시 업소로 돌아왔어요. 누구도 믿지 못하는 세상에서 오래 일한 업소가 오히려 안전하다고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성매매방지법 시행 10주년 행사에서 2014 민들레순례단원들이 성매수 실태 홍보와 설문조사를 하고 있다. 2014.9.22/뉴스1 © News1 김대웅 기자
성매매방지법 시행 10주년 행사에서 2014 민들레순례단원들이 성매수 실태 홍보와 설문조사를 하고 있다. 2014.9.22/뉴스1 © News1 김대웅 기자

◇성매매 여성 향한 욕설…'인권' 실감하다

당연히 건강 상태는 좋지 않았다. 산부인과 질환을 늘 걱정해야 했다. 잠을 자지 못해 복용했던 수면제, 업주의 강요로 먹었던 다이어트 약물 부작용도 심각했다. 적게 먹고 일하면 체력이 받쳐주지 않는다.  

업주가 '주사이모'를 불러 피로회복제를 놓아줬다. 약물을 빼돌려 면허 없이 성매매 여성들에게 주사를 놔주는 주사이모로부터 무슨 약인지도 모른 채 접종했다. 매번 아팠고 온몸이 아팠다.

화창한 봄기운이 느껴지는 안식처는 그에게 없었던 것일까. 봄날은 성매매 여성을 향한 모욕적인 욕설을 떠올리며 '인권'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실감했다.

봄날에게 '여성인권지원센터'란 존재는 여전히 남다르다. 그는 2009년 처음으로 여성인권지원센터의 법률지원을 받았고 그로부터 2년 이후 업소를 떠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가족과 관계는 순탄하지 못했다. 그는 또다시 여성인권지원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여성인권지원센터를 다시 찾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선 업소에서 해결하지 못했던 빚이 많아서 걱정이었고, 가족들과의 갈등도 있었어요. 이제 세상에 나와서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제 처지를 모르는 가족들은 '너는 왜 아직도 이렇게 살고 있냐'고 말했어요. 세상은 ‘성매매 여성은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더러운 X들’이라고 욕하고 있어요.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어요. 상담하면서 집이 아니라 여성인권지원센터에서 제공하는 쉼터에서 생활하기로 결심했죠."

-쉼터 생활은 어땠나요?
"제 속에 변화가 생겼어요. 손님 받으라고 깨우지 않는 공간, 나를 신경 써주는 사람들 덕분이었죠. 그간 경험하지 못한 영화나 공연도 센터 프로그램을 통해 볼 수 있었어요. '나는 이런 것 못 해봤는데,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걸 누리고 사는구나'를 비로소 깨달았죠. 변화된 삶에서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성매매경험당사자 자조모임도 큰 도움이 됐나요?  
"저는 탈성매매 후에도 '업소에서 사랑받고 돈 많이 벌었어'하며 으스댔었어요. 돈도, 학력도 없으니 그것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탈성매매 여성들과 함께 서로의 경험을 재해석하는 자조모임인 성매매경험당사자네트워크 '뭉치'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내가 폭력의 피해자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다른 여성들이 말하는 업주, 성 매수자들이 모두 내가 만나고 겪었던 사람들인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 성매매 여성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분노하게 됐죠."

수원역 성매매 업소들이 자진 폐쇄하기로 한 날인 31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성매매 업소 집결지가 썰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1.5.31/뉴스1 © News1 김영운 기자
수원역 성매매 업소들이 자진 폐쇄하기로 한 날인 31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성매매 업소 집결지가 썰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21.5.31/뉴스1 © News1 김영운 기자

◇과거 일했던 곳 다시 찾아간 이유

성매매에서 벗어났다고 트라우마가 한 번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봄날은 "길을 걷다가도, 잠을 자는 순간에도 트라우마들이 올라온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트라우마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과거 경험을 직면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지금도 여전히 힘들고 속이 울렁일 때가 있어요. 그런데 트라우마도 그냥 받아들이니 웃으면서 이야기하게 되더라고요. '오늘 업소 가는 꿈 꿨는데, 내일은 2차 나가는 꿈 꾸겠다'며 농담도 하지요. 그렇다고 무뎌진 건 아니에요."

그는 과거를 피하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끔찍한 경험을 안겨준 곳, 어린 시절부터 현재의 자신에게 따라붙는 트라우마의 근원을 마주봤다.

-과거 일했던 곳들도 다시 찾아 가봤다고요.  
"힘들었던 경험을 하나하나 직면하면서 나를 다독여주는 거예요. 피해 경험 당사자들은 끊임없이 자학하거든요. 과거 일했던 업소들을 직접 찾아가고, 업주를 만나면서 과거의 나를 돌아보는 것이죠. 온전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는 어린 자신에게 그늘이 돼주지 않은 가족들을 용서하지는 않았다. 다만 가족 또한 그 모습 자체로 인정하기로 했고 이후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가족들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가족은 남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가족에 대한 원망 때문에도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 마음 때문에 새롭게 얻은 제 삶을 망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가족이 가해자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죠. 이미 삶의 방식이 굳어진 분들을 제가 어떻게 바꾸겠어요. 그렇게 인정하고 나니까 화가 가라앉더라고요. 이제는 가족들과 제 나름대로 거리를 두고 있고요. 가끔 용돈은 드리지만 1년에 한두 번 보는 정도죠. 여동생은 제가 변한 모습을 보고 대단하다고 하기도 해요."

봄날은 "가난의 기억 때문에 편히 먹지 못했던 수제비도 최근 직접 끓여 먹어 봤다"며 웃었다. 그 웃음을 통해 내면의 단단함이 드러났다. 벼랑 끝의 기억에서 벗어나고 있는 봄날이 눈앞에 있었다.

⑤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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